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고려사 캡처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고려사 캡처

 

"국보급 문화재를 홀대 한다" vs "역사에 대한 무지다"

고려사 국보 논쟁이 한창이다.

 

고려사는 고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인물 등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관찬사서(官撰史書)로, 총 139권 75책. 전체 구성은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있다.

현전하는 고려사 완질본으로 다시 ‘고려사 논쟁’의 중심에 있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사(高麗史)는 1482년(성종 13)에 인출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乙亥字本)을 1613년(광해군 5)에 번각한 목판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고, 전래본 중 가장 일찍 인출된 것은 1482년(성종 13)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이나, 을해자본은 완질본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 을해자본 다음으로 간인된 이 판본의 완질본이 현재 4질 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 등으로 인해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아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이 같은 고려의 역사서 ‘고려사’가 국보나 보물이 아닌 지방 유형문화재(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돼 그것도 지방 사립대학(동아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는 것이 ‘고려사 논쟁’의 요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동아대가 소장하고 있는 고려사 완질본을 국보로 승격시키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문화재전문위원은 “오늘날까지 한국의 문화·역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고려국의 정사인 고려사 정본이 지금까지 왜, 이런 취급을 받도록 방치되고 있는지 문화재관리당국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질타하며 “우리겨레의 삶의 예지와 숨결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여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기본임무로 수행을 제대로 했는지 국회는 국정감사를 통해 따져 물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문했다.

또한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는 한 칼럼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도 손색이 없는 이름 그대로 ‘높고(高)’ ‘아름다운(麗)’ 위대한 '코리아 왕국(Kingdom of Korea, 936~1392)'의 대표 사서가 정작 지금의 '코리아 공화국(Republic of Korea, 1948~)' 대한민국에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국보도 보물도 아닌 지방유형문화재로 내팽개쳐 있는 것일까?”라며 “코리아 공화국(대한민국)이 국호와 적통을 이어받은 코리아 왕국(고려국)의 후예라면… 문화재청 등 관계 당국은 하루빨리 '고려사'를 국보로 승격시킬 것을 촉구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코리아(KOREA)라는 국명이 고려국에서 유래된 사실만으로도 우리 역사에서 ‘고려’는 교과서에서 접하는 조상들의 이야기만이 아닌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사료적,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가치가 높은데다 보관 상태까지 완벽에 가까운 동아대본 고려사가 국보나 보물이 아닌 지방유형문화재인 까닭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일부에서는 “역사에 대한 무지와 애국놀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고려사는 금속활자로 인쇄한 을해자본, 금속활자가 낡아 광해군 6년에 만들어진 목판 인쇄본 그리고 인쇄에 의하지 않고 손으로 글을 써서 만든 필사본 세가지 종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동아대가 보관하고 있는 고려사 판본은 총 139권 75책으로 된 완질본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상태로 알려져 있다.

인출 시기가 동일한 판본의 초쇄본으로 추정되는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태백산사고본과 대조해 본 결과, 자면(字面)이나 계선(界線)에서 나뭇결이나 터짐 현상 혹은 탈락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규장각 소장본보다 후쇄본임을 알 수 있다.

서울대 규장각은 동아대본 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동일한 목판본과 함께 고려사를 축약해 놓은 고려사절요 역시 소장하고 있다. 이 고려사절요는 금속활자 중에서 을해자본보다 앞선 시기에 주조된 갑인자본(세종16년, 1434년) 인쇄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고려사도 갑인자본의 금속활자로 된 인쇄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종 1년(1451년)에 완성된 고려사는 국내에만 80여본이 남아 전해지고 있으며, 이중 완질본은 총 5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2015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에서 고려사 필사본 완질이 발견되기도 했다.

동아대본 고려사를 국보나 보물로 승격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 인쇄나 인출 시기의 타당성을 떠나 사료적인 측면에서도 일부 문제되는 부분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사 중 「세가」는 직서주의를 취하면서도 고려왕의 연대 표기에서는 왕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했던 전통적 관례가 유교의 명분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 다음 해를 원년으로 기술해 당시의 금석문이나 문집 등의 기록과 1년의 차이가 있고 내용을 기전체로 분류하여 기록함으로써 연대를 잘못 기록하거나 기록하지 않은 사례가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부분은 고려사가 조선왕조의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을 담고 편찬됐다는 문제와 조선왕조실록 처럼 당대의 기록이 아닌 후대에 편찬된 자료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또한 2014 인하대고조선연구소 연구에 의해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고려사 단군편, 제왕편의 존재를 찾아냈으나, 현전하는 고려사 판본에는 단군편, 제왕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김종서·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 외에 다른 고려사가 존재하거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사가 편집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없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려사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고려사' 라는 자랑스러운 콘텐츠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을수 있다는 뜻이다.

고려사 판본 어떤것이 정본인가의 문제나 국보냐, 보물이냐, 문화재냐 하는 소모적인 논란 이전에 하루 속히 '고려'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우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를 포함해 유관 기관에서는 유적, 유물에만 치우쳐 왔던 연구 지원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고려사 연구에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해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한편, ‘고려사’ 완질본을 보관하고 있는 동아대 석당박물관 측은 2019년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에 보물지정 신청을 접수해둔 상태다.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담당학예연구사는 “보물지정조사는 신청접수 순서대로 하고 있는데 1년에 100여건이 넘는 실정이어서 담당직원 1~2명이서 지정조사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최대한 빨리 조사를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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