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에서 거대 그룹을 일군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 지난 19일 별세했다. 향년 99.

롯데그룹은 노환으로 입원 중이던 신 명예회장이 19일 오후 429분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고 이날 밝혔다. 일본 출장 중이던 신동빈 회장이 급히 귀국해 신 명예회장의 임종을 지켰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로 이병철 삼성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구인회 LG 회장, 최종현 SK 회장 등 한국 재계를 이끌던 창업 1세대 경영인시대는 막을 내렸다.

신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일본에서 성공한 뒤 한국에 돌아와 롯데그룹을 재계 5위로 키운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신 명예회장은 192110월 경남 울산에서 5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가난과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문학책을 읽으며 미래를 꿈꿨다.

스물한 살이 되던 1942년 단돈 83(870)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책 한 권을 손에 쥐고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관부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와세다 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학부) 야간부 화학과에 입학해 공부했고, 낮에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는 등 주경야독을 했다.

1944년 군수용 커팅 오일제조 공장을 세우면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장이 전소하는 시련을 겪었다.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어 재기에 성공한 신 명예회장은 껌 사업에 뛰어들었고 1948년 종업원 10명과 함께 롯데를 설립했다.

회사명 롯데는 감명 깊게 봤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속 여주인공 샤를로테(일본식 샤롯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신 명예회장은 한일 수교 이후 한국 투자 길이 열리자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이후 호텔롯데, 롯데쇼핑을 잇달아 창업하고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며 롯데를 호텔, 유통, 화학, 금융을 갖춘 그룹으로 일궈냈다.

신 명예회장이 기업보국의 꿈을 안고 금의환향한 지 50년이 넘은 지금, 롯데그룹은 95개 계열사가 약 84조 원(2018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신 명예회장은 한·일 양국에서 잦은 결혼과 형제들과의 분쟁, 자녀와의 다툼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10남매(55)의 장남인 신 명예회장은 3명의 부인과 4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신 명예회장은 첫 번째인 고() 노순화씨와 1940년 결혼,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을 낳았다.

신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껌 사업을 시작하고 롯데를 설립하고 종합제과 사업을 시작하면서1952년 일본 유력 가문의 딸인 시게미스 하츠코씨(重光初子)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일본명 시게미쓰 히로유키, 重光宏之)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시게미쓰 아키오, 重光昭夫)이 두 사람 슬하의 자식이다.

신 명예회장은 2015년 신동주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의 편에 서는 등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신 명예회장은 그룹내 이사직에서 물러나며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일 국교가 수교된 이후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국내 복귀한 신 명예회장은 1970년대 하이틴 스타 서미경씨와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이 신 명예회장과 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 명예회장은 사업 초기부터 형제들도 경영에 참여 시켰으나 잦은 불화를 빚었다.

2남 고() 신철호 롯데사장의 경우 1950년대 회삿돈 횡령 의혹으로 구속되며 사이가 멀어졌다.

3남 신춘호 농심 회장은 라면 사업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라진 경우다. 신 명예회장이 "시기상조"라며 말렸지만 신춘호 회장이 1965년 한국에 돌아와 라면사업에 진출했다.

신춘호 회장은 신 명예회장은 롯데라는 사명을 쓰는 것을 불허해 사명을 '농심'으로 정한 뒤 신 명예회장과 수 십 년간 왕래를 끊었다.

신 명예회장은 5남 신준호 푸르밀 회장과도 관계가 좋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부동산실명제가 시행되며 토지 분쟁을 벌였다.

막내 여동생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과도 그룹 로고를 두고 법적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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