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수기]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는 수 많은 참전경찰들의 희생댓가임을 명심해야!!
저자 : 김을노 (참전경찰 국가유공자회장)
본인은 1950. 2. 8 경남도 순경으로서 산청경찰서 근무 중, 6.25 동란 당시 북한군 남침으로 산청경찰서원 60명(2개 소대)과 함께, 1950. 7. 26 전북 장수 60령재로 출동 명령을 받아 북한군과 대치 작전타가 아방 경찰 지휘하던 함양경찰서 진기찬 서장 등 2명은 북한군에 피살되고 중과부적으로 퇴각 산청경찰서로 복귀하게 되었다.
상부의 작명이 산청 경찰서원 전원은 철수, 진주경찰서 이정용 서장의 지휘를 받으라는 지시로 전 서원은 철수중, 신안지서에 도착한 바, 진주시는 북한군이 점령하였다는 미군 병사의 만류로 도로를 우회, 의령 방면으로 도보로 도착한 바, 의령 대의 지서는 철수하고 도로변에는 인민군 환영 프랑카드 등이 눈에 띄어 함안 군북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경남 경찰국장 등 간부 5명이 산청서원은 군북 지서 주위를 경비하라는 지시로 잠복 중, 북한군과 교전, 퇴각하여 함안경찰서 주변 경비중, 북한군과 교전타가 산청 경찰서경리 주임 등 2명이 전사하고 동 경찰서는 소실되고 말았다.
또한, 여항산 정상을 점령하라는 작명으로 올라가는 중에 북한군의 기습으로 혼비백산이 되어 퇴각, 가야지서에 집결, 주변 경비 중에 미군으로부터 앞으로 대한민국의 최후보류인 마산을 점령하여 김해평야를 진격, 1950. 9. 1 북산에서 인공기 게양 승전기념 행사를 하기 위해 북한군 4개 사단(4·6·7·9)이 총공격할 것이니 대비하라는 전령을 받게 되었다.
머지 않아, 북한군 7사단 병력 1천여명이 도강하고자 하는 의령군 지정면 맞은편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고지에서 산청서원 58명이 대비 중, 동년 1950. 8. 31 밤 9시를 기하여 박격포 10여발과, 기관총 등으로 총공격해 왔고, 약 9시간 동안 교전 끝에 적 사살 200명, 유실된 시체는 부지기수, 생포 20명, 야포·박격포 등 22문, 기관총 등 370여정을 노획함으로 북한군은 대패, 동 작전 종료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내방, 세계 전사에 경찰의 큰 전공을 거양한 일이 없었다고 극찬한 바 있었다.
본 전투로부터 점차 북진하는 계기가 되어참전경찰 56명은 경남경찰국장 표창장(1950.9. 17자)을 받게 되었다.
◆ 1950. 9. 17 산청서로 복귀 대비 중, 북상치 못한 북한군 패잔병 대대병력 300여명이 산청군 차황면 만암리에서 산청경찰서 습격을 기도하고 있다는 민간 연락을 받아, 한신우 수사 주임 지휘하에 박격포 등 30여발을 집결지에 포격해 30여명 사살, 부상 20여명, 지리멸렬 황매산 쪽으로 도주케 했다.
◆ 소위 남북군단 이현상은 남한에서 월북한 공산당원 정예부대 100여명을 인솔, 백두대간인 태백산→덕유산→지리산까지 남하하면서 경유지 강원도, 충북도, 전북도, 경남도 경찰관서 습격, 우익인사 살해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지리산 공비 북한군 패잔병 및 남한 지방 조직 공산 주동자 등의 부역자 등과 합세하여 두목(남파 이현상) 지리산 총책 황성용 등과 합세 약 500명으로 부대 편성, 아방 경찰관서를 습격해 지역 공산화를 획책하여 지리산 근거리에 있는 산청경찰서 시천지서, 삼장지서 4개 고지점령을 목표로, 1차로 시천지서 원리고지(경사 서기수 등75명)에 포격 등 기관총 등으로 공격을 받아, 1950. 8. 20 오전 11시경 점령되어, 경찰관 김창수, 성희섭 등 2명이 전사하고, 동 고지 지휘하던 시천면장 정태상, 시천 청년단장 강영수 등 살해되고, 동 고지는 소실되었으며, 생존회원은 각기 분산 도피 2일 만에 귀환하게되었다.
2차로 1950. 8. 20 오후 2시경 시천지서(사리고지 경위 최무식 등 95명)에 포격 등 공격으로 점령되어 동 고지는 소실되고 직원 6명,보조대원 7명 등 전사하게 되었다.
3차로 1950. 8. 21 오전 삼장지서 대하 고지(경사 우병학 등 79명) 주둔, 수비 중에 역시 포격 기관총 공격을 받아 6명이 전사하고 동 고지 소실되었다.
4차로 경위 이수안 등 96명이 수비하고 있는 석남고지에도, 1950. 8. 21 밤 9시부터 앞에 3개 고지를 점령한 여세로 총공격으로, 전사 3명, 부상 7명이 발생하여 귀순 권유를 거절하고 사용하던 박격포 81m, 포탄 11발을 후퇴로에 투척, 고지 밑으로 가면 생포될 우려가 있어 고지능선인 지리산 쪽으로 가다가 역으로 퇴각 오봉재(970m)로 향해 탈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 앞에 4개 고지가 3일간 작전을 하였으나, 산청 경찰병력 및 타병력이 지원할 수 있는 도로를 차단 봉쇄되어 진입이 불가하여 고립상태에서 만 3일간 전투를 하였으나, 실탄 부족으로 퇴각하여 다시 탈환 작전에 본인이 지리를 선봉에서 안내하고 인공치하의 주민을 구제, 우리 경찰의 위상을 높이고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우리 경찰의 위대한 공로는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과 함께 더욱 영원할 것이다.
그 외에도 지리산 공비 잔비 소탕은 휴전 이후까지 계속하였으며, 지리산 공비 4명중 62년도 남노당 중부소지구당안완도, 강우형은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서 사살되고, 63년도 이홍이, 전순덕 2명은 아방 경찰의 잠복에서 이홍이 1명 사살, 정순덕 1명 생포로 지리산 주변에서 양민을 괴롭히던 공비들의 완전 토벌로 오늘의 지리산의 평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지리산 대전사 계곡 수색작전 : 아방 피해 극심
-1952. 2. 15 삼장지서 유재명 순경 등 특공대원 10명은 동 대원사 입구인 노루목 일대를 수색중 적 2명 사살, 칼빈총 2정 등 노획하고, 귀서 중에 공비들의 기습으로 출동한 유재명, 양재화, 공한수, 황철근 등 8명이 전사하고, 2명은 부상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53. 9. 18 경남의 경찰서에 지리산 공비 이영회 부대 8명은 지나가는 화물차를 탈취, 국군 보안부대로 가장, 동 경찰서 정문통과, 2층에 있던 서장(朴永東)을 살해하고, 경찰서 소실한 사건에 이어,
-1953. 9. 20 동 이영회 부대는 진양군 미천면 뒷산을 경유, 산청경찰서 생비랑 지서장 경사 구회상 등 70명이 수비 중인 지서를 습격, 10여명이 전사 동 지서는 소실되고,
-본인이 산청경찰서 사찰계 차석으로 병력 30명을 인솔, 생비랑 신안 경계인 청현리 들녘에 잠복하였던바, 동 이영회 부대는 퇴로를 바꾸어 황메산쪽으로 도주타가 아방 서남지구 전투 경찰대에 의해 이영회가 사살됨.
-그 외도 지리산 주변에서 다년간 근무 중 수많은 전투는 일일이 기록은 못하고, 다만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수한 전투와 희생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영원토록 지속하고 있음은 수많은 우리 경우(참전) 전사자들의 은공을 잊을 수 없으며, 작금도 휴전 아닌 전쟁은 지속하고 있음은 전 국민은 알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군인단체는 보훈단체로서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지만, 해방 이후부터, 공산 침략을 막아 정부 수립부터 각종 폭동사건,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 6.25전후 군과 같이 공산당 소탕, 북진 경찰 심산유곡에 잠입 아방 경찰관서 습격 양인살해 등 막아낸 우리 (참전)경찰의 보훈단체가 등록치 못하고 있다.
이를 추진키 위해 역대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현 정권시 이낙연 총리, 문희상 국회의장, 추미애 민주당 대표, 윤재옥 의원 등 발의 추진하였으나 허사가 되고, 현 정권에서도 여야 당선인 환영 행사가 있었는데, 기회가 없어 소회로 풀지 못한 점은 천추에 한스럽게 생각하면서, 우리의 공로를 인정 못받고 두서없이 남겨두고 여생을 마칠 것을 생각하니 더욱 원통하고, 우리 후배 경우 현직 경찰관에게도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임을 인식하길 바란다.